원도 에세이의 <아무튼, 언니> 한 문구
언니들은 가진 색깔도 다 달랐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무채색이던 나에게 각자의 고유한 색을 입혀주었다. …중략… 나는 그들에게 신파 없이 서로의 고통을 담담하게 대화로 풀어내는 법을 배웠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고도 상처를 드러내는 법과 눈물을 보일 땐 부끄러움 없이 펑펑 울며 기대는 법을, 시기나 질투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하나는 법을,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현재를 누리는 법을 배웠다. …중략… 어둠이 짙게 내린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은?
- 색깔
- 개인이 지닌 색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아끼는 아티스트 중에 빈지노도 “색깔없는 과일 누가 먹겠니”에서 말했듯이 무채색의 무매력을 말하며, 자신의 색깔을 강조했다. 또한, DPR IAN과 DPR LIVE는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무지개”라고 대답한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자신을 하나의 색깔이 아닌 다양한 색깔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 이처럼 각자 지닌 고유한 “진동”에 맞는 “색깔”을 찾는게 나를 찾는 것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 슬픔
- 고통을 담담하게 대화로 풀어내는 법… 나에게 “내 슬픔”은 다른 이와는 다른 특별한 슬픔이고, 드라마틱한 감정이다. 라는 오만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다른 이에게 내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내 슬픔을 공감할 수 없다라고 단정 짓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드라마틱한 내 슬픔이 신파라는 자기 혐오도 깔려있다.
- 어쩌면 모든 이들에게 찾아오는 슬픔의 종류는 비슷하지만, 그 깊이가 다른 듯 싶다. 그리고 그 깊이를 가늠하는 건 남이 할수도, 심지어 나 조차도 못하지 않을까? 그 슬픔에 매몰되면 더 깊어진다.
- 그래서 슬픔을 공유해서 더 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거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그 감정을 적을 뿐.
- 이 방법이 효과적이긴했다. 과거의 슬픈 감정을 되짚을 수 있었고, 내가 어떤 부분에서 슬펐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물론 극소수이지만.)
- 어쩌면 진정한 위로는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끌어내고 소화할 수 있도록 조절해주는것이지 않을까???